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추 이사금 (문단 편집) == 개요 == [[신라]]의 제13대 군주. '''기록상 최초로 등장한 김씨 [[이사금]]'''.[* 사실상 유일한 '''김씨 이사금'''이다. 미추 다음으로 김씨 군주가 된 [[내물 마립간|내물]](제17대) 때부터는 '''마립간'''이라는 칭호를 썼기 때문이다.]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의 6대손[* 알지 - [[성한왕|세한]] - 아도 - 수류 - 욱보 - 구도 - 미추]이며, 여러 전투에서 활약한 [[구도갈문왕|김구도]](仇道)의 아들이었다. 미추 외에도 다른 [[한자]] 표기로 '미조'(未照) 혹은 '미소'(未召)라고도 한다. 어머니는 이칠 [[갈문왕]](伊柒 葛文王)의 딸인 술례부인 박씨. 왕비는 [[조분 이사금]](제11대)의 둘째딸인 [[광명부인]] 석씨인데 아무래도 박씨 시대에 석씨인 [[탈해 이사금]](제4대)이 [[남해 차차웅]](제2대)의 [[사위]]로서 [[왕위]]에 오른 것처럼 석씨 [[왕실]]의 사위로서 왕위에 오르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신라 초기는 전왕의 사위가 왕위에 오르는 사례가 많았고 신라에서 왕의 성씨가 달라지는 부분들은 대부분 사위 계승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다만 여기서 특이한 건 장인인 조분 이사금이 미추 이사금의 생질이기도 했다는 것. 즉 미추 이사금은 누나의 손녀와 혼인하게 된 것이다. 다만 조분 이사금의 어머니이자 미추 이사금의 누나인 석골정의 아내는 미추 이사금보다 상당히 나이가 많았고 김구도와 김미추 또한 부자 사이라고 해도 역시 나이차가 상당히 많았을 가능성이 높다. 현실에서도 조카가 삼촌보다 나이가 많은 경우는 왕왕 있기 때문.] 물론 [[첨해 이사금]](제12대)이 정상적인 즉위 과정을 밟고 왕위에 오른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한동안 혼란스러웠을 것으로 보이는데 《[[삼국사기]]》를 통해 이러한 혼란상을 추측할 수 있다. 즉위 원년에 [[용]]의 출현과 [[금성]]에 큰 [[불]]이 났다는 기록이 있으며, 보통은 신라에서 왕이 즉위하자마자 먼저 하는 국조묘에 [[제사]]를 지내는 행사를 재위 2년째에야 했기도 하고, 아버지 김구도를 [[대원군]] 격인 갈문왕에 봉한 것도 2년차에 했던 점 등이 바로 그것이라 볼 수 있다. 기록에서 미추 이사금의 딸이 두 명 나온다. 즉, [[내물 마립간]](제17대)의 왕비 [[보반부인]]과 [[실성 마립간]](제18대)의 왕비 [[아류부인]]이다. 《삼국사기》기록상 연대를 실제로 믿으면 미추 이사금의 딸로 도저히 볼 수가 없으나, 《삼국사기》는 '''신라의 건국 연대를 고구려보다 앞당기려고 의도적으로 당긴 의도가 역력함이 분명하되 계보도 자체는 실제로 개연성이 맞음이 상당부분 확인되고 있으므로 실제로 딸일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바꿔서 생각해봐야 할 부분은 각각 따로 재위했다고 알려진 신라 초창기 임금들이 실제로는 재위기가 겹칠 가능성이다. 일반적으로 [[보반부인]]이 [[장녀]], [[아류부인]]이 [[차녀]]로 알려져 있다. 여러 [[금석문]]에 등장하는 신라의 [[태조]] [[성한왕]]을 최초의 김씨 왕인 미추 이사금으로 보는 학설도 있다.[* [[김알지]]나 그의 아들 김세한 등 여러가지 이설이 있다.] 훗날 신라 하대에 이르러서는 [[중국]]에서 들여온 [[유교]]식 5묘제를 실시하면서 김씨 왕계의 시조격으로서 신위가 [[종묘]]에 모셔지게 되었다.[* 진짜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는 성씨가 달라 유교식으로 해석이 어렵기 때문에 5묘가 아니라 신라 고유의 [[종교]] 시설이었던 [[신궁]]에서 따로 모신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